선조묘 소재지(先祖墓 所在地)로 알 수 있는 세거지 변천사(世居地 變遷史)

족보(族譜)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세거지(世居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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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進士公宗中 세거지(世居地) : 화성시 매송면 송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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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現存)하는 동래정씨 족보는 1655년(효종6년)에 발간된 “乙未譜”와 1716년에 발간된“丙申譜”와 1919년에 발간된 “己未譜”가 있다
위 족보들을 살펴보면 乙未譜에는 시조(始祖)부터 22世까지 간단한 기록만 있는 반면, 300년(1716년)전에 발간된 병신보(丙申譜에)는 지금의 진사공파의 선조인 19世 휘 원기公은「子孫居在 廣州下道松洞」 이라는 내용이 19世 휘 석기公은 「子孫居在 廣州」라는 내용이 기록(記錄)되어 있다.
1789년(정조13년)에 지금의 화성시 매송면 송라리가 수원유수부 소속으로 바뀌기 전까지는 광주부(廣州府)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廣州松洞“廣州”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고 “子孫居在” 라는 말을 보아서 지금의 송라리에 13世 휘 효경公이 송라리에 정착 한 후 세거지를 삼아 후손들이 번창하다가 17세기
초 22世 휘 창래公 시기에 수원시 화서동으로 世居地를 移轉하기까지 약 200년간 居住하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진사공의 형(兄) 5世 휘 인호공이 송라리에 정착한 후 16世 휘 즙公 17世 휘 사윤公 18世 휘 섬公 19世 휘 진기公(生父 진사공 증손자 18世 휘 용) 20世 휘 교공 21世 휘 광세公까지 송라리에 거주(居州)하셨는데 휘 광세公의 장남(長男) 22世 휘 태익公은 경기도 이천으로 세거지(世居地)를 옮기셨고, 차남(次男) 23世 휘 하익公은 아들 24世 휘 석주公까지 송라리에 거주(居住)하시다가 25세
휘 택원公때
음죽(陰竹.충북 음성지역)으로 세거지(世居地)를 옮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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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교관공종중 세거지(世居地) : 용인시 기흥구 공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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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보(丙申譜)에는 교관공종중의 선조인 19世 諱 漢驥公의 기록(記錄)에는 “此下諸派 子孫居在 水原”이라는 내용이 있는데, 지금의 용인시 공세동이 당시에는 龍仁縣이었고, 용인현은 1872년(고종9년)에 발간된“용인현읍지”라는 기록을 보면 당시까지도 水原府에 소속되어져 있었기 때문에 17세기 중반에 휘 한기公의 선친(先親)이신 휘 인公때 송라리에서 부(父) 17세 사안공과 兄인(휘 용.선公)에게서
분가(分家)
독립(獨立)하여 공세동으로 이주하였고 그 자손들이 세거지로 삼아 거주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공세동선영에 있는 휘 인 교관公의 묘비석(墓碑石) 후면(後面)에 康熙 22년 (1683년.숙종9년)3월에 建立했다고 記錄이 되어진 것으로 보아 孫子이신 휘 길公(1642년生.인조20 ~1701년卒.숙종27)이 세우신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묘비석이 교관공종중 선조(先祖)들께서 공세동에서 世居地로 삼아 居住하셨다는 또 다른 證據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공세동에서 19세기 말까지 약 250년간 거주(居住) 28世 휘 낙준公 시기에 수원시 화서동으로 移住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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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번째 세거지(世居地) : 수원시 장안구 화서2동(고양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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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世 諱 은(訔)公 17世 諱 사안(師顔)公 18世 諱 瑢(용).瑄(선)公 19世 諱 碩驥(석기)公 20世 諱 僖(희)公까지 조선 초기 15세기부터 16세기 말까지 200년간 화성시 매송면 송라리에서 거주(居州)하다가, 17세기 초에 21世 諱 昌萊公 時期에 수원시 화서동으로 世居地를 移轉하여 2000년 초(初)까지 약 300년간 居住하였다.
18世 諱 인(璌) 교관공(敎官公)의 후손들은 용인시 공세동에서 19세기 말까지 약 250년간 터전을 잡고 살다가, 28世 諱 樂駿公 시기에 수원시 화서동으로 移住하여 17世 휘 사안(師顔)公의 子 18世 휘 선(瑄).휘 인(璌)公의 후손들이 모여 동래정씨 진사공파 집성촌(集成村)을 형성(形成)하여 거주(居住)하다가 2000년대 고양골(화서2동)이
도시개발로 인하여 집성촌(集成村)으로서의 모습이 상실되었다.


수원 화서동 마애삼존불상(水原 華西洞 磨崖三尊佛)'은 원래 동래정씨 약사불(東萊鄭氏藥師佛)로 불렸으나, 약사불의 특징인 약함(약상자)이 없어 학술적으로 '수원 화서동 마애삼존불상'으로 명칭(名稱)이 변경되었다.
이 불상은 하나의 바위에 세 구의 불상(삼존불)이 새겨진 마애불 형식이다.
본존 (중앙)은 여래 좌상(坐像)으로 표현되었다. 머리 뒤에 원형의 두광(頭光)이 표현되어 있다. 육계는 평평하게 표현되었으며, 이마 중앙에 백호(白毫)의 흔적이 보인다. 법의(옷)는 통견(通肩, 양 어깨를 덮은 형태)이며, 옷주름은 간략하게 표현되었다. 소박한 형태의 연화대좌(蓮華臺座) 위에 앉아 있다. 협시보살(좌우)은 본존과는 달리 보살 입상(立像)으로 조각되었다. 머리에는 삼산관(三山冠) 형태의
보관(寶冠)을
쓰고 있다. (일반적인 동자상과 구분되는 특징) 이러한 보관을 쓴 협시상은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인 소박한 조각 수법과 생략된 옷 주름 표현 등은 고려 중기 이후의 조각 경향을 반영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 화서동(고양골)에 있던 절집에 봉안되어 마을 공동체 신앙의 대상이었다.
화서동 재개발과 함께 1980년대 동래정씨(東萊鄭氏) 집성촌(集成村) 선산(先山) 밑으로 옮겨졌다가, 2006년 향토유적(수원시 유형문화재 13호)으로 지정된 후 수원박물관 야외 전시장으로 옮겨져 보존 및 관리되고 있다.

▲ 고양골 한가운데에 있었던 450년 된 회화나무
수원에서 나이 많은 회화나무는 화서2동에 있는 노거수가 유일하다. 현재는 화양초등학교 북쪽, 길 건너편 모퉁이 제16호 소공원에 이식되어 있다. 원래는 주변 아파트 개발 전 고양골 동래(東萊) 정(鄭)씨 집성촌의 자연마을에 있었으나, 2007년 아파트 건설로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높이는 약 13m, 가슴높이 둘레는 4.1m이며 수령은 450년으로 추정된다. 보호수로서 보존 가치가 크지만, 이식된 수목이기에 법적으로는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수령이 오래된 노거수는 대부분 전설을 간직한다. 고양골(화서2동) 회화나무 역시 전설이 전해진다.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이 나무 아래에서 혼인을 약속한 남녀가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자 청년은 의병으로 나가게 되었고, 두 사람은 전쟁이 끝나면 회화나무 아래에서 혼례를 올리기로 했다. 청년은 살아남으려 애썼으나 끝내 돌아오지 못했고, 여인은 매일같이 나무 아래에서 그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청나라
군사들이 마을에 들이닥쳐 여인을 겁탈하려 했으나, 나무 구멍 속에서 황구렁이가 나타나 여인을 구했다. 여인이 혼절하자 구렁이는 눈물을 흘리며 다시 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회화나무줄기 가운데 뚫린 구멍에서 구렁이가 나타났다고 한다. 8.15 해방과 6.25 전쟁 때에도 황구렁이가 나무 주변을 맴돌았다고 전해진다.
고양골 사람들은 이 나무를 신성하게 여겨 해마다 나무 아래에 볏짚으로 만든 터주가리를 설치하고 떡을 올리며 제사를 지냈다.
화서2동 회화나무는 현재도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다만 줄기 일부가 부후 되어 외과수술을 받았으나 틈이 벌어지고 틀어져 있다. 나무줄기는 전체적으로 기울어져 있으며, 굵은 두 가지는 양팔을 벌린 듯한 형상으로 마치 축제장의 바람인형을 연상시킨다. 지금은 마을의 제사 등과 같은 보전 활동은 없어 안내판만 외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어 아쉬움이 크다. - 수원화성신문에서 발췌(拔萃)-
선조묘 소재지(先祖墓 所在地)로 알 수 있는 세거지 변천사(世居地 變遷史)

족보(族譜)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세거지(世居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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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進士公宗中 세거지(世居地) : 화성시 매송면 송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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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現存)하는 동래정씨 족보는 1655년(효종6년)에 발간된 “乙未譜”와 1716년에 발간된“丙申譜”와 1919년에 발간된 “己未譜”가 있다
위 족보들을 살펴보면 乙未譜에는 시조(始祖)부터 22世까지 간단한 기록만 있는 반면, 300년(1716년)전에 발간된 병신보(丙申譜에)는 지금의 진사공파의 선조인 19世 휘 원기公은「子孫居在 廣州下道松洞」 이라는 내용이 19世 휘 석기公은 「子孫居在 廣州」라는 내용이 기록(記錄)되어 있다.
1789년(정조13년)에 지금의 화성시 매송면 송라리가 수원유수부 소속으로 바뀌기 전까지는 광주부(廣州府)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廣州松洞“廣州”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고 “子孫居在” 라는 말을 보아서 지금의 송라리에 13世 휘 효경公이 송라리에 정착 한 후 세거지를 삼아 후손들이 번창하다가 17세기
초 22世 휘 창래公 시기에 수원시 화서동으로 世居地를 移轉하기까지 약 200년간 居住하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진사공의 형(兄) 5世 휘 인호공이 송라리에 정착한 후 16世 휘 즙公 17世 휘 사윤公 18世 휘 섬公 19世 휘 진기公(生父 진사공 증손자 18世 휘 용) 20世 휘 교공 21世 휘 광세公까지 송라리에 거주(居州)하셨는데 휘 광세公의 장남(長男) 22世 휘 태익公은 경기도 이천으로 세거지(世居地)를 옮기셨고, 차남(次男) 23世 휘 하익公은 아들 24世 휘 석주公까지 송라리에 거주(居住)하시다가 25세
휘 택원公때
음죽(陰竹.충북 음성지역)으로 세거지(世居地)를 옮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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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교관공종중 세거지(世居地) : 용인시 기흥구 공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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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보(丙申譜)에는 교관공종중의 선조인 19世 諱 漢驥公의 기록(記錄)에는 “此下諸派 子孫居在 水原”이라는 내용이 있는데, 지금의 용인시 공세동이 당시에는 龍仁縣이었고, 용인현은 1872년(고종9년)에 발간된“용인현읍지”라는 기록을 보면 당시까지도 水原府에 소속되어져 있었기 때문에 17세기 중반에 휘 한기公의 선친(先親)이신 휘 인公때 송라리에서 부(父) 17세 사안공과 兄인(휘 용.선公)에게서
분가(分家)
독립(獨立)하여 공세동으로 이주하였고 그 자손들이 세거지로 삼아 거주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공세동선영에 있는 휘 인 교관公의 묘비석(墓碑石) 후면(後面)에 康熙 22년 (1683년.숙종9년)3월에 建立했다고 記錄이 되어진 것으로 보아 孫子이신 휘 길公(1642년生.인조20 ~1701년卒.숙종27)이 세우신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묘비석이 교관공종중 선조(先祖)들께서 공세동에서 世居地로 삼아 居住하셨다는 또 다른 證據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공세동에서 19세기 말까지 약 250년간 거주(居住) 28世 휘 낙준公 시기에 수원시 화서동으로 移住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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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번째 세거지(世居地) : 수원시 장안구 화서2동(고양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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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世 諱 은(訔)公 17世 諱 사안(師顔)公 18世 諱 瑢(용).瑄(선)公 19世 諱 碩驥(석기)公 20世 諱 僖(희)公까지 조선 초기 15세기부터 16세기 말까지 200년간 화성시 매송면 송라리에서 거주(居州)하다가, 17세기 초에 21世 諱 昌萊公 時期에 수원시 화서동으로 世居地를 移轉하여 2000년 초(初)까지 약 300년간 居住하였다.
18世 諱 인(璌) 교관공(敎官公)의 후손들은 용인시 공세동에서 19세기 말까지 약 250년간 터전을 잡고 살다가, 28世 諱 樂駿公 시기에 수원시 화서동으로 移住하여 17世 휘 사안(師顔)公의 子 18世 휘 선(瑄).휘 인(璌)公의 후손들이 모여 동래정씨 진사공파 집성촌(集成村)을 형성(形成)하여 거주(居住)하다가 2000년대 고양골(화서2동)이
도시개발로 인하여 집성촌(集成村)으로서의 모습이 상실되었다.


수원 화서동 마애삼존불상(水原 華西洞 磨崖三尊佛)'은 원래 동래정씨 약사불(東萊鄭氏藥師佛)로 불렸으나, 약사불의 특징인 약함(약상자)이 없어 학술적으로 '수원 화서동 마애삼존불상'으로 명칭(名稱)이 변경되었다.
이 불상은 하나의 바위에 세 구의 불상(삼존불)이 새겨진 마애불 형식이다.
본존 (중앙)은 여래 좌상(坐像)으로 표현되었다. 머리 뒤에 원형의 두광(頭光)이 표현되어 있다. 육계는 평평하게 표현되었으며, 이마 중앙에 백호(白毫)의 흔적이 보인다. 법의(옷)는 통견(通肩, 양 어깨를 덮은 형태)이며, 옷주름은 간략하게 표현되었다. 소박한 형태의 연화대좌(蓮華臺座) 위에 앉아 있다. 협시보살(좌우)은 본존과는 달리 보살 입상(立像)으로 조각되었다. 머리에는 삼산관(三山冠)
형태의 보관(寶冠)을
쓰고 있다. (일반적인 동자상과 구분되는 특징) 이러한 보관을 쓴 협시상은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인 소박한 조각 수법과 생략된 옷 주름 표현 등은 고려 중기 이후의 조각 경향을 반영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 화서동(고양골)에 있던 절집에 봉안되어 마을 공동체 신앙의 대상이었다.
화서동 재개발과 함께 1980년대 동래정씨(東萊鄭氏) 집성촌(集成村) 선산(先山) 밑으로 옮겨졌다가, 2006년 향토유적(수원시 유형문화재 13호)으로 지정된 후 수원박물관 야외 전시장으로 옮겨져 보존 및 관리되고 있다.

▲ 고양골 한가운데에 있었던 450년 된 회화나무
수원에서 나이 많은 회화나무는 화서2동에 있는 노거수가 유일하다. 현재는 화양초등학교 북쪽, 길 건너편 모퉁이 제16호 소공원에 이식되어 있다. 원래는 주변 아파트 개발 전 고양골 동래(東萊) 정(鄭)씨 집성촌의 자연마을에 있었으나, 2007년 아파트 건설로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높이는 약 13m, 가슴높이 둘레는 4.1m이며 수령은 450년으로 추정된다. 보호수로서 보존 가치가 크지만, 이식된 수목이기에 법적으로는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수령이 오래된 노거수는 대부분 전설을 간직한다. 고양골(화서2동) 회화나무 역시 전설이 전해진다.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이 나무 아래에서 혼인을 약속한 남녀가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자 청년은 의병으로 나가게 되었고, 두 사람은 전쟁이 끝나면 회화나무 아래에서 혼례를 올리기로 했다. 청년은 살아남으려 애썼으나 끝내 돌아오지 못했고, 여인은 매일같이 나무 아래에서 그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청나라
군사들이 마을에 들이닥쳐 여인을 겁탈하려 했으나, 나무 구멍 속에서 황구렁이가 나타나 여인을 구했다. 여인이 혼절하자 구렁이는 눈물을 흘리며 다시 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회화나무줄기 가운데 뚫린 구멍에서 구렁이가 나타났다고 한다. 8.15 해방과 6.25 전쟁 때에도 황구렁이가 나무 주변을 맴돌았다고 전해진다.
고양골 사람들은 이 나무를 신성하게 여겨 해마다 나무 아래에 볏짚으로 만든 터주가리를 설치하고 떡을 올리며 제사를 지냈다.
화서2동 회화나무는 현재도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다만 줄기 일부가 부후 되어 외과수술을 받았으나 틈이 벌어지고 틀어져 있다. 나무줄기는 전체적으로 기울어져 있으며, 굵은 두 가지는 양팔을 벌린 듯한 형상으로 마치 축제장의 바람인형을 연상시킨다. 지금은 마을의 제사 등과 같은 보전 활동은 없어 안내판만 외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어 아쉬움이 크다. - 수원화성신문에서 발췌(拔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