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사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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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2_03a.jpg公의 증조부(曾祖父)는 숭정대부(崇政大夫)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 보문각대제학 (寶文閣大提學)을 역임(歷任)하셨다 . 시호(諡號)는 정절(靖節) 호(號)는 설학재(雪壑齋) 휘(諱) 矩(구)公이시며 조부(祖父)는 경산 현령(慶山縣令)을 지내신 휘(諱) 효경 (孝卿)公 이시고  父(부)는 고양군수(高陽郡守)를 지내시고 형조참의(刑曹參議)로 추증되신 휘 수(穗)公이시다.

휘 穗公은 근영군 능의 딸이자 태종의 손녀인 태안향주(泰安鄕主) 전주이씨를 부인으로 맞이 하였는데, 태안향주는 1남 1녀를 두시고 27세에 돌아가셨다.

公의 모(母)는 숭정대부 우의정 휘(諱) 한의 증손녀인 교하 노씨이시며 형(兄)은 장남 돈녕부정(敦寧副正) 휘(諱)인후公과 직장(直長) 휘(諱)인호.인걸公 승지(承旨) 휘(諱)인준公이시며 동생은 첨정(僉正) 휘(諱) 인웅公이시다.

公의 장형(長兄)이신 휘(諱)인후公의 아들이며 公의 조카인 16世 소우당 전한(典翰) 휘(諱)응公(1490~1522)은 1507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合格)하고 1514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서 을과(乙科)로 及第(급제)하셨다.

1519년 이조정랑을 역임한 뒤 홍문관 응교.전한(典翰.종3품)으로 발탁(拔擢) 되었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조광조의 무죄를 주장하여 부여로 유배(流配)당했고 1522년 33세에 적소(謫所)에서 돌아가셨다.

 

公은 1510년(중종5년)에 진사시에 합격(合格)하셨고 前妣 의령 남씨 에게서 계공랑 訔(은)公과 1녀를 두셨고, 後妃로 파평 윤씨. 홍주 이씨를 두셨다.

公이 명문(名門) 후예(後裔)로 형제(兄弟)여섯이 현달(顯達)하고 公도 진사(進士) 이시니 높은 덕(德). 아름다운 행실(行實)로 기록할 만한 일이 많을 법 하지만 세월(歲月)이 오래되어 실전(失傳)하니 안타까울 뿐이다.

집안 어르신들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口傳으로는 大科(대과)를 준비하시기 위해 전북 진안 마령 지역으로 홍주 이씨와 내려가셨다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당시 조선(朝鮮)의 정치 상황이 수없이 많은 사림(士林)의 신진관료(新進官僚)들이 公의 조카인 응처럼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죽고. 公의 또 다른 조카인 휘 은(誾)公(인호公의 차남)이 기묘사화로 인해 조정에 사직(辭職)하고 인호公과 형인 즙公이 계시는 화성시 송라리 世居地를 떠나 경북 군위에 定着(정착)했다는 기록들을 보았을 때, 公 또한 단순히 과거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아무 연고도 없는 진안 마령으로 내려간 것이 아니라, 성품이 높고 굳세어서 사림세력(士林勢力)이 몰락(沒落)하고 훈구세력(勳舊勢力)들이 得勢(득세)하는 세상과 맞지 않아 공명(功名)에는 뜻이 없으셔서 출사(出仕)의 뜻을 접고 한양을 떠나 진안으로 내려가신 것이 아닌 가 추측해 볼 수 있다

 

公의 墓(묘)는 을미보(1655年).병신보(1716年).기미보(1919年)족보(族譜)를 통해서 전북 진안 마령에 위치하고 있다고 전해져 왔으나, 분묘(墳墓)는 실전(失傳)되어 그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전해져 오는 구전(口傳)과 문헌(文獻)을 따라  2003년에 당시 문중의 정규명회장과 첨사공 정현모회장등이 진안 마령을 찾아가서 답사하고 2004년 4월에 전북 진안 마령에서 公과 홍주이씨의 분토(墳土)를 모셔 오고,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에 있던 의령 남씨. 파평 윤씨도 모셔와 현재(現在) 소재지(所在地)인 화성시 매송면 송라리에 함께 사위합부(四位合祔) 하여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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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仁英 進士公 墓 全景(화성시 송라리선영 所在)

sub2_03a.jpg公의 증조부(曾祖父)는 숭정대부(崇政大夫)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 보문각대제학 (寶文閣大提學)을 역임(歷任)하셨다 . 시호(諡號)는 정절(靖節) 호(號)는 설학재(雪壑齋) 휘(諱) 矩(구)公이시며 조부(祖父)는 경산 현령(慶山縣令)을 지내신 휘(諱) 효경 (孝卿)公 이시고  父(부)는 고양군수(高陽郡守)를 지내시고 형조참의(刑曹參議)로 추증되신 휘 수(穗)公이시다.

휘 穗公은 근영군 능의 딸이자 태종의 손녀인 태안향주(泰安鄕主) 전주이씨를 부인으로 맞이 하였는데, 태안향주는 1남 1녀를 두시고 27세에 돌아가셨다.

公의 모(母)는 숭정대부 우의정 휘(諱) 한의 증손녀인 교하 노씨이시며 형(兄)은 장남 돈녕부정(敦寧副正) 휘(諱)인후公과 직장(直長) 휘(諱)인호.인걸公 승지(承旨) 휘(諱)인준公이시며 동생은 첨정(僉正) 휘(諱) 인웅公이시다.

公의 장형(長兄)이신 휘(諱)인후公의 아들이며 公의 조카인 16世 소우당 전한(典翰) 휘(諱)응公(1490~1522)은 1507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合格)하고 1514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서 을과(乙科)로 及第(급제)하셨다.

1519년 이조정랑을 역임한 뒤 홍문관 응교.전한(典翰.종3품)으로 발탁(拔擢) 되었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조광조의 무죄를 주장하여 부여로 유배(流配)당했고 1522년 33세에 적소(謫所)에서 돌아가셨다.

 

公은 1510년(중종5년)에 진사시에 합격(合格)하셨고 前妣 의령 남씨 에게서 계공랑 訔(은)公과 1녀를 두셨고, 後妃로 파평 윤씨. 홍주 이씨를 두셨다.

公이 명문(名門) 후예(後裔)로 형제(兄弟)여섯이 현달(顯達)하고 公도 진사(進士) 이시니 높은 덕(德). 아름다운 행실(行實)로 기록할 만한 일이 많을 법 하지만 세월(歲月)이 오래되어 실전(失傳)하니 안타까울 뿐이다.

집안 어르신들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口傳으로는 大科(대과)를 준비하시기 위해 전북 진안 마령 지역으로 홍주 이씨와 내려가셨다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당시 조선(朝鮮)의 정치 상황이 수없이 많은 사림(士林)의 신진관료(新進官僚)들이 公의 조카인 응처럼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죽고. 公의 또 다른 조카인 휘 은(誾)公(인호公의 차남)이 기묘사화로 인해 조정에 사직(辭職)하고 인호公과 형인 즙公이 계시는 화성시 송라리 世居地를 떠나 경북 군위에 定着(정착)했다는 기록들을 보았을 때, 公 또한 단순히 과거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아무 연고도 없는 진안 마령으로 내려간 것이 아니라, 성품이 높고 굳세어서 사림세력(士林勢力)이 몰락(沒落)하고 훈구세력(勳舊勢力)들이 得勢(득세)하는 세상과 맞지 않아 공명(功名)에는 뜻이 없으셔서 출사(出仕)의 뜻을 접고 한양을 떠나 진안으로 내려가신 것이 아닌 가 추측해 볼 수 있다

 

公의 墓(묘)는 을미보(1655年).병신보(1716年).기미보(1919年)족보(族譜)를 통해서 전북 진안 마령에 위치하고 있다고 전해져 왔으나, 분묘(墳墓)는 실전(失傳)되어 그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전해져 오는 구전(口傳)과 문헌(文獻)을 따라  2003년에 당시 문중의 정규명회장과 첨사공 정현모회장등이 진안 마령을 찾아가서 답사하고 2004년 4월에 전북 진안 마령에서 公과 홍주이씨의 분토(墳土)를 모셔 오고,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에 있던 의령 남씨. 파평 윤씨도 모셔와 현재(現在) 소재지(所在地)인 화성시 매송면 송라리에 함께 사위합부(四位合祔) 하여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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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仁英 進士公 墓 全景(화성시 송라리선영 所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