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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특례시 송죽동과 19世 수군절도사 휘 한기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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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0회 작성일 26-05-12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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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1.png수원특례시 송죽동과 19世 수군절도사 휘 한기公

정석현(鄭錫鉉)

 

19世 휘 한기公의 자료를 찾아보던 중에 대한제국 광무3년(1899년) 5월에 발간된 수원군읍지(水原郡邑誌)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휘 한기公의 기록이 인물(人物). 고적(古蹟)편에 있었다

 

人物 鄭漢驥

仁祖 登武科官 丁丑以勇力被選參入壯士與 朴浻陪昭顯世子入瀋陽而還 官至忠淸水使

少時射於一用面今日用面松竹里射亭前有 斷岸高可三四丈鄭於岸頭騰身 而上下 居人指其岸謂鄭水使嘗與

朴浻 崔廷顯 同遊戲以手納石臼中拳以擧之 崔亦能之朴則不能而恥之以 拳衝破 臼底貫手而擧之三人又嘗與角力 四方各一丈之石皆能運之掌

上石尙在京中云

 

인조(仁祖)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관직(官職)에 나아갔다.

정축년(1637년)에 용맹(勇猛)과 힘이 뛰어나 선발되어 장사(壯士)의 무리에 참여하였고, 박형(朴浻)과 함께 소현세자(昭顯世子)를 수행하여 심양(瀋陽)에 들어갔다 돌아왔다. 벼슬은 충청수사에 이르렀다

젊었을때는 일용면(지금의 용면) 송죽리(現송죽동)의 사정(射亭) 앞에서 활쏘기를 하였는데, 그 앞에는 높이가 서너길쯤 되는 깍아 지른 절벽이 있었다 정한기는 절벽 꼭대기에서 몸을 날려 뛰어 내렸다가 다시 올라오곤 하여서 마을 사람들은 그 절벽(絶壁)을 가르켜 『정수사(水使)가 몸을 날리던 절벽(騰身岸)』이라고 불렀다

일찍이 박형.최정현과 함께 놀며 힘겨루기를 하였는데,손을 돌절구속에 넣고 주먹을 쥔채 그것을 들어 올리곤 하였다. 최정현도 할 수 있었는데 박형은 하지 못해 부끄럽게 여겼다. 주먹으로 절구 바닥을 쳐 깨뜨려 손을 관통시켜 들어 올렸다. 또 세 사람은 힘겨루기를 하였는데,사방 한길쯤 되는 돌도 모두 손바닥 위로 들어 옮길 수 있었다고 하는데 그 돌이 아직 서울에 남아 있다

 

古蹟 『 騰身岸 』

在府北七里許日用面松竹里卽仁祖朝水使鄭漢驥騰身

上下處見人物鄭漢驥

 

『“등신안(騰身岸)”은 수원부 북쪽 약 7리 일용면 송죽리에 있다.

이는 인조때 수사(수군절도사) 정한기가 몸을 날려 오르내리던 곳으로 그의 인물됨을 보여준다 』

 

등신안(騰身岸)이라는 지명(地名)은 조선시대에도 현재에도 송죽동에 없는 것으로 보아 단순한 지역명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해석했을 때

“ 몸을 날려 오른 언덕 ”이라고 보면, 인물편에서 보듯 휘 한기公의 무예 실력과 기개(氣槪)와 비범함을 표현하여 후대에까지 전하기 위해 붙여진 것 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약 130여전에 발간된 수원읍지(水原邑誌) 수원 출신 인물(人物)편에 사실(史實)과 야사(野史)가 혼합되어 약 250년이 흘렀음에도 휘 한기公의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고, 휘 한기公의 흔적을 알 수 있는 등신안(騰身岸)이라는 명칭이 수원시ㆍ화성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광교산(光敎山). 팔달산(八達山). 세마대(洗馬臺)와 같이 고적편에서 소개되고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우면서도 130년전이 지난 현재 그 장소가 전해지지않고 흔적이 남아있지않아 아쉬운마음 가득하다.

하지만 우리가 수원부읍지(水原郡邑誌)를 통해서 휘 한기公이 어린시절과 청년시절을 수원(水原) 그것도 우리 진사공파의 정빌딩이 있는 송죽동일원에서 보내셨다는것을 알 수 있게 된것이 큰 의미(意味)라고 할 수 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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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9년(광무3년) 발간 수원군읍지(水原郡邑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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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부지도(水原府地圖.187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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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전도(華城全圖.17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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