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청 수군절도사영 탐방기록
|
정석현(鄭錫鉉)


▲ 장소 : 충남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오천항)
충청수영성(사적 제501호)
충청수영성은 조선 초기(중종4년.1509년)에 설치되어 고종 33년(1896) 폐영(廢營)되었으며, 그 규모는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에 따르면 조선 초기 충청수영과 그 산하에 배속된 군선과 병력이 군선(軍船) 142척에 수군수(水軍數)가 총 8,414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충청수영의 관할구역은 금강하구부터 평택항까지 였는데 해안선을 따라 한양으로 가는 조운선(漕運船)을 보호하고 왜구침탈을 방지했고, 근대에는 이양선을 감시하는 등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본영에는 군선40척 수군 약 2000여명이 있었으며 최고사령관은 수군절도사(정3품)이었다.
충청수영성은 1510년 수사 이장생이 돌로 쌓은 성이며, 사방(四方)에 4대 성문(城門)과 소서문(少西門)을 두었고, 동헌을 비롯한 관아건물 영보정(永保亭), 관덕정(觀德亭) 대섭루(待燮樓),능허각(凌虛閣),고소대(姑蘇臺) 등이 있었으나 허물어졌고 현재는 서문 망화문(望華門)과 건물로는 진휼청(賑恤廳), 장교청(將校廳), 공해관(控海館)이 보존되고 있다. 망화문은 화강석을 다듬어 아치(Arch)형으로 건립하여
발전된 석조예술을
볼 수 있으며, 현재는 윗부분이 무지개모양인 서문을 비롯하여 1,650m 가 남아있다.
성내(城內)에는 33동 312간이나 되는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조정(탁지부)에 명에 의하여1896년 폐영되었고, 1901년 3월 6일 건물들을 불태워 장교청을 비롯한 11개동(現在 3개동)만 남았다고 한다.
충청수영성은 천수만 입구와 어우러지는 경관이 수려하여 조선시대 시인 묵객들의 발걸음이 잦았던 지역으로 성내의 영보정이 유명했고, 서문 밖 갈마진두(渴馬津頭)는 충청수영의 군율 집행터로 병인박해(丙寅迫害)때 천주교신부 다섯 명이 순교한 곳이다.
근대에 들어 도로개설이나 호안매립 등으로 인하여 훼손된 일부 구간을 제외하면 충청수영성은 나머지 성지(城址) 뿐만 아니라 그 주변 지형이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군사목적에서 마련된 충청지역 수군 지휘부로써 충남의 수군편제와 조직, 예하 충청지역 해로(海路) 요해처(要害處)에 배치되었던 수군진과의 영속 관계 등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적으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아 2009년 8월에 사적 제501호로
125,326㎡(38,000평)이
지정되었다
충청수영성 서문(西門) 망화문(望華門)



▲ 성내(城內)에서 바라본 西門

▲ 西門에서 진휼청.영보정 가는길
진휼청(賑恤廳)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210호
진휼청은 흉년에 충청수영 관내의 빈민구제를 담당하던 곳 이었다
충청수영이 폐지된 이후 민가로 쓰이다가 1994년 토지와 건물을 매입하여 보존하고 있는데 정면 5칸 측면과 측면2칸의 팔작지붕이며 대청,온돌방. 튓마루,부엌등이 있다

▲ 성벽에서 바라본 진휼청 後面

▲ 진휼청 前面
영보정(永保亭)
영보정은 수영성안에 있던 정자로 1504년 수사 이량이 처음 짓고 계속 손질하여 고쳐 온 우리나라 최고 절경의 정자였다. 조선시대 많은 시안 묵객들이 찾아와 경치를 즐기며 시문을 많이 남겼는데, 특히 다산 정약용, 백사 이항복은 이곳을 조선 최고의 정자로 묘사했다. 하지만 충청수영성 페영(1896년)후 소실되었다. 현존하는 영보정은 2010년 충청수영성 발굴조사때 영보정터의 유구를 발견하여
2018년에 복원한 것이다,



▲ 영보정에서 바라본 오천항

▲ 다산 정약용 宴游記

▲ 성벽에서 바라본 오천항

▲ 성벽에서 바라본 영보정
장교청(壯佼廳)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411호
조선시대 충청수영안에는 많은 건물들이 있었는데, 1896년 페영과 함께 대부분 없어지고, 장교청(객사), 공해관의 삼문, 진휼청만 남아있다
장교청은 오천초등학교 자리에서 옮겨진 충청수영 객사(客舍)이다.
수군절도사가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시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예를 올렸으며,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의 숙소로도 사용되었다
이 객사의 이름은 운주헌(運籌軒)이다


삼문(三問)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412호
삼문은 수군절도사가 집무하던 공해관(控海館)의 출입문 역할을 하던문으로 원래 객사와는 별도 건물인데 지금은 한자리에 보존

충청수군절도사(忠淸水軍節度使) 공적비(功績碑)
공적비가 많이 유실되어 조선시대 공적비가 18개. 후손들이 세운 공적비가 3개가 있었는데 19世 諱 雲驥公의 공적비는 현존하지 않았다




▲ 조선시대때 세워진 공적비

▲ 추후에 후손들이 세운 공적비
※ 이번 충청수영 방문목적은 선조(先祖)이신 휘(諱) 한기(漢驥)공의 흔적을 찾아보면서, 諱 漢驥公에 대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는 충청병마절도사(종2품) 승정원일기에는 충청수군절도사(정3품)로 기록되어 있어 충청수영에 남아있는 공적비중에 漢驥公의 공적비(功績碑)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함이었다.
공적비가 있다면 승정원일기의 기록이 정확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한기공의 공적비는 없었지만 많은 공적비가 유실(遺失)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이셨다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이셨다라고 명확하게 결론은 내릴 수는 없었다.
다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뿐만 아니라 여러 문헌(文獻)에서 수군절도사를 역임(歷任)하신 기록들이 있는 것을 바탕으로 이사회의 결의와 보령시와의 협의(協議)를 통해 후손(後孫)들이 유실된 공적비(功績碑)를 다시 세운 타 문중처럼 새롭게 공적비를 세우는 것을 과제(課題)로 삼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