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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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1.png2世 중시조(中始祖) 崇政大夫 議政府 左贊成 설학재(雪壑齋) (휘) 구()

 

1350년生(고려 충정왕 2)~1418년卒(태종 18. 68세)

 

   6世 보(輔)→7世 승종(承宗)→8世 균(筠)→9世 유의(惟義)→10世 호(湖)→11世 양생(良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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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학재公 시제(음 10월1일) 모습 -

 

公은 동래정씨(東萊鄭氏)의 시조로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역임한 정회문(鄭繪文)의 후손이며, 호장(戶長)을 역임한 정지원(鄭之遠)의 12세손이고, 교서랑(校書郎)을 역임한 정 보(鄭輔)의 7세손이고, 시사(寺事)를 역임한 정유의(鄭惟義)의 증손이다. 봉산군(蓬山郡)에 봉해진 정 호(鄭湖)의 손자이고, 감찰대부(監察大夫)를 역임한 정양생(鄭良生, ?~1392)의 아들이다.

 

 

자(字)는 중상(仲常)이고, 시호(諡號)는 정절(靖節) 호(號)는 설학재(雪壑齋)이다.

1377년(우왕 3년) 문과에 을과 2등으로 급제하셨고, 1382년 설학재공은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를 지냈고 당시 이방원(태종)우간의대부(右諫議大父)로 재직해 친분이 매우 두터웠다

1392년 조선이 개국 되자 설학재公은 불사이군(不事二軍)의 정신으로 고려의 신하로 절개를 지키며 조 견(趙狷).원 선(元宣) 두 분과 함께 양주 송산으로 거처를 옮겨 은둔하였다.  

1394년(태조 3년) 이방원(태종)의 끈질긴 설득으로 조선에 출사하여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지내고 1394년(태조 3년)에는 왕명으로 한리(韓 理), 조서(曺庶), 권홍(權弘), 변혼(卞渾) 등과 함께 <법화경> 4부를 금니(金泥)로 썼다.

정종때 도승지(都承旨)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태종때 공조판서(工曹判書) 호조판서(戶曹判書), 예조판서(禮曹判書), 판한성부사(判漢城府使)을 거쳐 1417년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으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건너가 홍무연간(洪武年間: 명태조시대(明太祖時代))에 만든 각궁(角弓)을 구입하여 온 후에 의정부 좌찬성(종1품.현 부총리급)으로 임명되었고 풍질로 사직하였다.

1418년(태종 18년) 公의 나의 69세에 졸(卒)하였다

태종은 이에 신하들과의 조회를 3일간 중단하고 중관(中官)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주었고 공의 죽음을 크게 애도하여 정절(靖節)이라는 시호와 치제문(致祭文) 하사하셨디

  

- 태종의 치제문 -

 

松山一髮(송산일발)   首陽同屹(수양동흘)

멀리 송산을 보니 수양산같이 우뚝하구나

萬古日忠(만고일충)    伯夷豈一(백이기일)  

만고의 충신이 어찌 백이 한 사람뿐이겠는가?

光風霽月(광풍제월)    鄭公襟懷(정공금회)  

화창한 바람 비 개인 뒤의 맑은 달은

정공의 마음속에 품은 생각 일세

道德文章(도덕문장)   百世師表(백세사표)  

 

도덕과 문장은 영원히 후세의 모범이 되다

 

公의 흔적이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것은 1409년(태종 9)에 예서. 초서. 전서에 능하셔서 태종의 명으로 제액(題額)을 쓰신 태조대왕(이성계) 건원릉신도비(健元陵神道碑. 보물1803호)가 경기도 구리시에 있으며 벼슬을 사직(辭職)하고 내려와 송산에서 쓰신 ‘송산유거’라는 한시가 전해지고 있다.

 

公은 여말 선초의 격변기(激變期)에 조선의 개국(開國)에 참여하지 않고 고려의 신하로서 절개(節槪)를 지키기 위해 지금의 의정부시 민락동에 조견.원선과 함께 칩거하였다. 그 후 이 세 분의 뜻을 기리기 위해 정조 22년(1798년) ‘삼귀서사’를 지어 조겸.원선의 위패를 모셨고, 순조4년(1804)에 송산사로 이름을 고쳐 불렀다.

17.18세기를 거치면서 조선은 병자호란을 통해서 씻을 수 없는 굴욕(屈辱)과 수치(羞恥)를 당하고, 상국(上國)으로 섬겼던 명(明)이 망하고 만주족(滿洲族) 청(淸)이 들어서면서 유림세력(儒林勢力)과 중앙정치 사대부(士大夫)들은 소중화(小中華)를 자처(自處)하면서 명(明)의 계승자라는 의식(意識)이 강하게 자리 잡았다.

 

이런 명(明)에 대한 의리를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삼는 풍조(風潮)가 조선사회에 만연(蔓延)해지면서, 公의 후손들도 설학재공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으로 고려에 대한 의리를 지켜 태종이 수없이 관직을 하사했지만 출사(出仕)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그 증거로 태종이 公께서 돌아가시자 정절(靖節)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린 것과 公께서“내가 죽어도 분토산(태종에게 하사받은 산/서울 중랑구 망우동 위치)에 장사 지내지 말고 송산(의정부시 용현동 위치)에 묻으라“라는 유언(遺言)을 들고 있고 그 주장은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하지만 고려(高麗)에 대한 의리(義理)를 지킨다고 조정에 출사하지도 않는 公에게 정몽주를 비롯해 이복동생들(이방석外). 처가 처남들(민무구外). 심지어 아들(세종)의 장인(심온)까지 자신이 나아가는 길에 해가 되거나,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위험이 있는 자는 거침없이 제거한 태종이 정3품 당상관이상 관직을 2-3차례도 아니고 10여 차례나 제수(除授)하였다는 것은 공이 조선에 출사(出仕)하셨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비록 雪壑齋公이 망조(望朝)가 된 고려에 대한 충성(忠誠)이라는 이상(理想)과 새로 개국(開國)된 조선(朝鮮)에 참여(參與)라는 현실(現實) 사이에서 치열한 갈등(葛藤)끝에 결단(決斷)을 내리시어 조선왕조에 참여함으로써,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대의명분(大義名分)을 버렸다고 해서 조선개국(朝鮮開國)에 참여한 公의 결단(決斷)과 충정(忠情)을 폄하(貶下)해서는 안될 것이다.

또한 公께서 유언(遺言)으로 “내가 죽어도 분토산(태종에게 하사받은 산/서울 중랑구 망우동 위치)에 장사 지내지 말고 송산(의정부시 용현동 위치)에 묻으라“ 하셨던 말씀은 개인의 부귀영달(富貴榮達)을 위해 조선 개국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오직 나라와 백성을 위해 시대상황(時代狀況)을 포용(包容)하고 받아들이셨기에 분토산(분토산)을 거부하고 송산(松山)에 거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公은 아직 혼란스러웠던 조선 초에 계림(경주). 개성. 한성(서울)의 부윤(現 시장)으로서 백성들의 고충을 살피어 해결하셨고, 산업통상자원부나 국토해양부의 역할을 담당하는 호조. 공조. 예조의 판서(現 장관)로 재직하여 중앙행정 업무를 담당하고, 의정부좌찬성(현 부총리)까지 임명될 정도로 국가에 헌신(獻身)하셨다.

 

이렇게 국가에 충성하고 백성을 살피는 일에 평생 견마지로(犬馬支路)의 삶을 사셨던 公의 유지(維持)를 받들고 행하기 위해, 전국에 흩어져 있는 후손(後孫)들이 1997년에 숭정사(崇靖祀)를 신축(新築)하여, 설학재공을 주벽(主壁)으로 모시고 맏아들 효경(孝卿) 둘째아들 선경(善卿)두 분을 종향(宗享)으로 모시어 매년 음 3월 15일 향사(享祀)를 올리고 있으며, 음력10월1일에는 송산에 있는 공의 묘역에서 묘제(墓祭)를 올리고 있으며 2002년 8월에 公의 업적(業績)을 기리기 위해 송산재(松山齋)를 의정부시 용현동에 중건(重建)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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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학재公 묘역(墓域) 전경(全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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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학재公 묘비(墓碑)-    - 설학재公 신도비(神道碑) -

※ 신도비(神道碑)는 임금이나 종이품 이상의 벼슬한 분들의 묘 근처 길가에 세우던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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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모문(景慕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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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산재(松山齋) 전경(全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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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정사(崇靖祠) 전경(全景)-

의정부시 용현동 소재(所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