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해(註解)
동래정씨(東萊鄭氏) 병신보(丙申譜) 구발(舊跋) 1716
예전 문충공(文忠公) 구양수(歐陽脩)가 세보(世譜)를 짓고는 세상 사람들이 성씨(姓氏)의 소자출(所自出)을 모른다고 나무라면서 심지어 금수(禽獸)만도 못하다고 하였는데 후세에 의논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구양씨(歐陽氏)가 득성(得成)한 지 오래되었으며 그 사이 문학(文學)하는 선비들 역시 많았는데 문충공 대에 와서야 비로소 보첩을 만들었으니 세상의 다른 사람을 나무라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라고 하였다. 대저 문충공이 나무란 말은 전적으로 보첩을 중히 여겨야 한다는 뜻에서 한 것인데 의논하는 자들이 그 집 세보가 늦게 나왔다고 나무라니 문충공보다 더 심하다고 하겠다.
우리 집안 보첩은 이와 달라서 지난 만력(萬曆) 을유년에 인의(引儀) 벼슬에 있던 흥선(興善)이 임당(林塘) 상공(相公)에게 자문(諮問)하여 보첩을 처음으로 만들었으며 그 七○년 후인 우리 효종(孝宗) 을미년에 이르러 참판공(參判公) 양필(良弼)이 경주부윤(慶州府尹)이 되어 계속해서 대동보(大同譜)를 발간했는데 지금 경주공(慶州公) 필동(必東)이 또 六○년이 지난 을미년에 이곳 경주에 부임해와서 다시 이어서 새 보첩을 발간하니 전후해서 六, 七○년 사이로 세 번 간행하여 발꿈치를 이어서 간행한 것이니 구양씨(歐陽氏)들이 문충공에 이르러 세보(世譜)를 만든 것에 비하면 크게 잘한 것이 아니겠는가?
또 구보(舊譜)의 서문(序文)과 발문(跋文)을 보면 을유년 초보(初譜)는 너무 간략하여 五代 이하의 자손은 을미년 중보(中譜)에서 바로잡아 二권으로 만들어 규모가 비로소 확대되고 절목(節目)이 자세하게 되었지만 그런대도 소루(疏漏)하고 틀린 곳이 많았다. 이번 보첩을 편찬하면서는 경주공이 널리 성씨에 통한 것이 옛날 이른바 육보(肉譜)한 것보다 더 지나쳤고 또 六, 七년 동안 심력(心力)을 기울려 지금에야 완성해서 하나도 빠짐없이 자상하게 만들었으니 문충공의 세보에 비교해 어떨지 모르겠다. 전후하여 보첩을 모두 경주에서 간행하고 태세(太歲) 역시 같으니 천시(天時)와 인사(人事)가 어찌 이처럼 부합한지 기이한 일이다.
불초(不肖) 내가 경주공과 함께 대사구(大司寇) 내산군(萊山君)에게서 나왔는데 단면친(袒免親: 상복(喪服)을 입지 않아도 되는 먼 일가)이 된 것이 이미 五세나 되었지만 세대가 멀어져 서로를 길에서 만나 모르는 사람처럼 보지 않게 된 것 역시 우리 보첩이 분명한 데 힘입은 것이다. 이번 보첩을 간행할 때 내가 마침 울산도후부사(蔚山都護府使)가 되어 땅이 서로 가까워 발문을 부탁하는데 일을 잘 못한다고 사양할 수가 없는데 굳이 외람되이 사양하면 그 죄가 더욱 클 것 같기에 이상과 같이 권말에 한 마디 쓴다.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울산도호부사(行蔚山都護府使) 정동후(鄭東後) 삼가 발문을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