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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萊鄭氏族譜丙申譜舊序(동래정씨족보병신보구서)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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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운진
댓글 0건 조회 4회 작성일 26-05-29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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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해(註解)

동래정씨족보(東萊鄭氏族譜) 병신보(丙申譜) 구서(舊序) 1716

 

옛날에는 도종(都宗), 가종(家宗)의 직책 및 대종(大宗), 소종(小宗)이란 글이 있었고 예()에는 소목(昭穆)이 있고 사()에는 연표(年表)가 있었으니 이것이 예법의 시초 아니겠는가? ()나라 이후 유교(儒敎)가 발달하면서 중국(中國)의 세족(世族)들 가운데 족보를 편찬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으며 우리나라 사대부(士大夫)들은 더욱 모두 이를 중히 여겨 거의 가보(家寶)로 보관했다. 우리 동래정씨(東萊鄭氏)는 복야공(僕射公) 이래 지금까지 팔()백년 동안 혁혁(赫赫)한 고관대작(高官大爵)이 대대로 찬란하게 이어져 교목세신(喬木世臣)의 집안이 되어 세상의 큰 명족(名族)을 뽑으라면 맨 먼저 정씨를 꼽게 된다. 예전 임당상공(林塘相公)이 처음으로 보첩을 만들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구본(舊本) 가운데 남아 있는 서문(序文)만 사고해 볼 수 있다. 그 후 추천공(秋川公) 양필(良弼)이 이어서 완성해 이()권으로 간행했으니 그가 친한 이를 친하게 하고 종족(宗族)간 돈목(敦睦)하게 한 뜻이 크게 유익했다고 하겠다.

그러나 지금 보첩을 편찬한 후 또 한 갑자(甲子)가 돌아와 천지(天地)의 유행(流行)하는 기운과 생화(生化)하는 이치가 이미 지나게 되어 소자(昭子)가 말한 만물이 소장(消長)하고 성쇠(盛衰)하는 기한이 차게 되었으며 더군다나 사람의 일은 세대(世代)가 날로 변하고 날마다 번성(蕃盛)해지는 것임이라. 그러니 옛 족보를 이어서 새로 족보를 편찬하는 일은 바로 사가(史家)가 역사를 편찬하는 것과 같아서 대대로 붓을 잡고 편찬할 인물이 끊어지지 않은 연후에야 바야흐로 한 세대나 한 가지일도 빠뜨리지 않게 된다.

나 필동(必東)은 젊어서부터 역사를 쓰는 여가에 우연히 譜學에 뜻을 두고 우리 집안에서 족보를 편찬하지 않은 일을 개탄해 왔었다. 하루는 종장(宗長)인 동평도위(東平都尉)에게 이를 말씀드렸더니 역시 기꺼이 들으시고 해보라고 권하였다. 그래서 태복(太僕) 욱선(勖先), 수찬(修撰) 찬선(纘先), 佐郞 내주(來周) 제공(諸公)과 함께 경향(京鄕)의 여러 종족에게 글을 보내자 계첩록(系牒錄)이 다 도착해 왔다. 동평공이 또 지필(紙筆)을 대 모두 원고(原稿)를 일곱 번 고쳐서야 비로소 완성되어 도합 二十七()이 되었다. 정확을 기하기 위해 여러 집안의 족보 백()여 본()을 널리 가져다 보고 안음(安陰) 수령(守令)을 지낸 종운(從耘)의 원류보(源流譜)를 참고했다. 그 범례(凡例)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과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 두 선생의 은진송씨(恩津宋氏) 족보와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 선생의 반남박씨(潘南朴氏) 족보를 참고해 절충(折衷)하고 취사(取捨)했다. 그래서 비록 구보(舊譜)와 자세하고 간략함과 규모(規模)는 다르지만 참람(僭濫)하다는 비난은 면할 수 있을 것이요 옛 사람이 말한 정(), (), (), () 네 가지 보법(譜法)으로 논하더라도 크게 잘못된 것은 없을 것이다.

처음에는 책 상자에 넣어 보관만 하고 즉시 반포(頒布)하지 않은 것이 혐의찍었는데 을미년(乙未年)에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경주부윤(慶州府尹)이 되었다. 보첩을 간행할 뜻을 두고 동평공(東平公)과 의논했으나 마침 흉년이 들어 비용이 넉넉하지 못한 데다가 정무(政務)에 바빠 여가가 나지 않았었다. 그래서 그 이듬해에야 비로소 인쇄하여 널리 전하게 되었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부지런히 도와준 동평공의 정성스런 뜻과 여러 해 동안 공을 들여 노력한 필동(必東)의 마음이 이제야 비로소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대개 구보(舊譜)를 만든 것은 추천공(秋川公)이 이 고을 부사로 있던 날 양파상공(陽坡相公)이 권해서 이루어진 것인데 지금 동평공이 양파상공이 권하던 바로써 나를 권면(勸勉)하였으니 이에서 그 유지(遺志)를 이어받은 것을 알 수 있으며 나 필동 역시 요행히 추천공(秋川公)의 뒤를 이어 그가 역임한 옛날 그 고을의 부사가 되어 구보를 이어 간행했으며 그 세차(歲次)주갑(周甲)이 돌아왔으니 일이 우연히 이처럼 기약(期約)하지 않고도 부합(符合)될 수 있단 말인가? 이 역시 기이한 일이다.

생각하건대 족보는 인도(人道)와 크게 관계된다. 일찍이 서명(西銘: 송나라 성리학자 장재(張載)가 지은 글)의 글을 보건대 이른바 이()가 나뉘어 천지(天地) 부모(父母)가 되니 만민(萬民)이 동포(同胞)가 된다고 하였으니 인애(仁愛)의 이치가 그 사이에 이르러 사지(四肢)가 마비(痲痹)되고 아픈 근심이 더는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선현(先賢)들이 그림으로 그려 놓고 보면서 말씀하기를 <사람의 이치는 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라고 하셨다. 더군다나 한 사람의 몸이 마침내 억천만(億千萬) 사람으로 나누어져 마치 나무에 뿌리가 있고 여러 가지가 각기 달린 것 같으며 마치 물에 근원이 있는데 여러 물줄기가 나뉘어져 마치 나무에 뿌리가 있고 여러 가지가 각기 달린 것 같으며 마치 물에 근원이 있는데 여러 물줄기가 나뉘어 흐르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그 몸뚱이와 껍질은 같지 않고 모습도 다르지만 그 친애함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길가는 사람처럼 보아서야 되겠는가? 한번 책장을 열면 멀고 가깝고 친하고 소원(疎遠)한 관계가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나타나 처음에는 같은 부모 형제의 몸에서 함께 나와 나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 보첩 안에 들어 있는 자는 서명(西銘)에서 이른바 동포(同胞)라는 두 글자처럼 범연(泛然)하고 막연(漠然)한 관계일 뿐만은 아니다. 이 보첩을 보는 자는 반드시 회옹(晦翁: 남송의 학자 주희(朱熹)를 말함)이 서명을 논평한 뜻을 마음으로 삼아서 <박애(博愛)하여 정()을 치우치게 나타내어서는 안 된다>라고 핑계대지 말아야 한다. 이에 외람(猥濫)됨을 피하지 않고 누누이 간절하게 말하는 바이다.

 

숭정(崇禎) 기원(紀元) () 두 번째 병신년(丙申年) 중하(仲夏)

후손 통정대부(通政大夫) 수경주부윤(守慶州府尹) 정필동(鄭必東)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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