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해(註解)
동래정씨족보(東萊鄭氏族譜) 을미보(乙未譜) 구서(舊序) 1619-1655
세교(世敎)가 쇠퇴하면서부터 종법(宗法)이 무너지고 구족(九族)이 친하지 않게 되면서부터 백성이 흥(興)하지 않게 되어 친(親)이 다하지 않았는데도 길가는 사람처럼 보아서 시조(始祖) 한 사람이 모두 한 자손으로 보아 은근하게 돌보아 기른 뜻을 전혀 모르니 어찌 심히 슬프고 마음 아픈 일이 아니겠는가? 대개 태사공(太史公: 사기(史記)를 지은 사마천(司馬遷)을 말함)이 옛날의 어진 군자(君子)로 은택이 후(厚)하고 종족이 성대한 자를 세가(世家)로 서열(序列)했는데 쇠퇴한 말세에 이르러 그 세(世)를 제대로 들 수가 없어서 조씨(曹氏)의 조상을 혹 우순(虞舜)이라 하고 혹 진탁(振鐸)이라 하고, 주씨(朱氏)의 조상을 혹 전욱(顓頊)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단주(丹朱)라 하기도 하니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는가? 그보다 더 쇠퇴한 시대에 이르러서는 더욱 문란(紊亂)해져 분명치가 못해 최(崔), 노(盧), 정(鄭), 이(李)의 시대에도 오히려 뒤섞인 것을 걱정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족보를 잊어버린 폐해(弊害) 때문이다.
상세(上世)에 이미 어진 군자가 있어서 덕(德)을 후히 쌓아 후손에게 물려주었고, 그 후세에서도 또 반드시 아름다운 경사(慶事)를 이어받아 세덕(世德)을 바꾸거나 떨어뜨리지 않으면서 더욱 닦아나가는 것이 마치 농부(農夫)가 이미 종자를 심고 또 김을 매 집안을 일으켜 대족(大族)이 되고 전해 내려가 세가(世家)가 되어 보답해서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까지 공(功)을 끼쳐 주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또 보첩을 편찬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우리 정씨(鄭氏)는 동래(東萊)에서 시작했는데 고려 초기에 이미 유명한 대가(大家)가 되어 지금 칠(七)백여 년이 되었다. 그 동안 훌륭한 경상(卿相)과 유명한 인물이 역사책에 이어져 오고 성대한 덕망과 유열(遺烈)이 끊어지지 않았으니, 이는 어진 선조들이 덕을 쌓아 남겨 주어 후손들이 그 아름다움을 이어받아 더욱 닦아 나왔기 때문에 태사공(太史公)이 세가를 서열(序列) 하면서 정씨세가를 넣은 것이다.
정씨는 전에 족보가 없었는데 선조(宣祖) 때 상국(相國) 임당공(林塘公)이 처음으로 오대(五代) 이하의 세보(世譜)를 만들었으나 병란(兵亂)에 곧 훼손되고 말았다. 그 칠십년(七十年) 후에 정양필(鄭良弼) 공이 경주부윤(慶州府尹)이 되어 지나는 길에 지금 상국(相國) 정공(鄭公)을 찾아가 하직하였는데 경주공은 바로 충정공(忠貞公)의 증손(曾孫)이요 지금 상국은 임당공의 증손이다. 그래서 보첩의 일을 경주공에게 위임해 경영하게 했는데 흩어진 여러 형제와 나누어진 지종(支宗)을 모조리 찾아내어 널리 자문(諮問)해 바로잡아 편찬하여 상하(上下)권으로 만드니 세계(世系)와 종파(宗派)가 손바닥 안에 놓인 듯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되었다. 이에 인쇄에 붙여 널리 전하게 했는데 한 달이 채 못되어 다 마쳐 손을 놓았다.
대저 수십 대(代) 오랜 세월과 천백 명의 많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모두 시조 한 사람에게 근본하니 그 시초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근원이 일체(一體)임을 알 수 있고 한 몸에서 나누어진 골육(骨肉)이어서 모두 화합해 친하게 지내 친소(親疏)의 차이가 없게 해야 한다. 그래서 후세 사람으로 지금을 어어가는 자로 하여금 이를 바탕으로 하여 계속 보첩을 만들어 나가 세대가 멀어질수록 더욱 이런 뜻을 잊지 않게 했으니 경주공의 근본을 돈목(敦睦)하게 하려고 한 뜻이 부지런했다고 할 수 있다.
또 내가 들은 바가 있으니, 정씨의 상세(上世)에 휘(諱) 문도(文道)란 분이 늙어 집에서 쉬고 있는데 매양 읍재(邑宰)가 집무를 시작하는 나발 소리를 들으면 문득 뜰에 내려가 절을 올렸다고 한다. 그 공경(恭敬)함이 이와 같았는데 그 상(喪)을 당해 상여가 화지산(華池山)에 이르니 눈이 녹고 호랑이가 웅크리고 앉아 있는 기이한 자리가 있어 거기에다 장사지냈다고 한다. 내가 여러 차례 동래군(東萊郡)을 지났는데 그 곳 토착민(土着民)들이 그의 무덤과 살던 짐을 가리키며 음덕(陰德)을 심은 보답이라고 하였다.
보첩이 완성되자 경주공이 그 아들 진사(進士) 화제(華齊)를 보내 나에게 서문(序文)을 써달라고 청한다. 대개 나의 선대(先代)가 허씨(許氏)의 소자출(所自出)이요 허씨는 또 정씨의 외손(外孫)이니 내가 이 역사(役事)에 한 마디 말을 돕는 것도 그리 주제넘은 일은 아닐 것이다.
기미년(己未年: 一六一九年) 중추(仲秋)
가선대부(嘉善大夫) 전(前) 이조참판(吏曹參判) 이민구(李敏求) 삼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