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해(註解)
동래정씨족보(東萊鄭氏族譜) 을유보(乙酉譜) 구서(舊序) 1585
동래정씨(東萊鄭氏)는 고려(高麗) 때 복야공(僕射公)이 처음으로 명신(名臣)이 되고 그 네 아들이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함으로써 벼슬하는 세족(世族)이 되었다. 그 후 보첩(譜牒)이 분명하지 못해 곽숭도(郭崇韜: 오대(五代) 후당(後唐)때 사람으로 연대가 맞지 않는 사람이 인사를 나누었다는 말)가 곽자의(郭子儀: 당나라 현종(玄宗) 때 사람)에 절을 하게 되었다는 비난이 있게 되어 식자(識者)들이 병통으로 여겼다.
하루는 인의(引儀) 벼슬에 있는 흥선(興善)이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우리 일족(一族)이 비록 큰 문중이지만 계파(系派)가 잘못된 곳이 많아 바로 잡고자 했는데 너무 번거로워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그래 五대조 판서공(判書公)의 세계(世系)를 가져다 보건대 그 자손을 모조리 찾아내어 혹 경향(京鄕) 각지의 숫자가 매우 번성했으며 문견(聞見)한 이외에도 다시 내외 여러 일족을 모아 쓰고, 그 가운데 미진(未盡)한 것은 몸소 스스로 따져서 실제대로 된 후에 그만 두었으니 그 마음씀이 참으로 부지런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재종에 순경(純褧)이 주간하여 통문(通文)을 돌리고 인의가 도모해 편찬해서 一년 만에 완간하니 아버지와 아버지, 아들과 아들, 형과 형, 아우와 아우의 차례가 질서 정연하여 조금도 문란(紊亂)하지 않게 되어 참으로 일대(一代)의 훌륭한 보배가 되었다. 내가 일찍이 옛 사람들이 만든 보첩을 보면 혹 한대(漢代)의 연표(年表)를 모방하기도 하고 혹은 대종(大宗)과 소종(小宗)으로 하기도 하였는데 그 사례(事例)는 비록 다르지만 그 씨족(氏族)을 나누고 세차(世次)를 따진 것은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는 남녀의 혼인(婚姻)은 족류(族類)로 하기 때문에 그 성명(姓名)을 일일이 제대로 될 것이다. 우리들은 마땅히 먼저 친근한 자를 말미암아 소원(疎遠)한 자까지 돈목(敦睦)해야만 거의 보첩을 만든 뜻을 저버리지 않게 될 것인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만력(萬曆) 十三年(書記 一五八五年) 二月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 겸영경연사 감춘추관사(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春秋館事) 정유길(鄭惟吉) 삼가 씀